생명보험협회와 22개 생보사 최고경영자(CEO)들이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 생명보험교육문화센터에 모여 '소비자와의 다섯 가지 약속'을 내놨다. 금융업권 처음으로 마련된 '약속의 날(Promise Day)' 행사다.
김철주 생보협회장과 전 회원사 CEO가 공동 결의문에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결의문을 한 줄씩 뜯어보면 고개가 갸웃해진다. 약속의 상당수가 이미 시행 중이거나 법으로 정해진 사항과 겹친다.
발표된 다섯 가지 약속은 △의사결정의 소비자 기준 전환 △불완전판매 상품 판매 금지 △건전한 판매질서 확립 △보험금 지급 지연 방지 △취약계층 보험 접근성 확대다.
첫 번째 약속에 들어간 '소비자보호 전담조직과 책임자(CCO) 역할 강화'부터 그렇다. 2021년 3월 25일 시행된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은 이미 금융회사에 CCO 선임과 금융소비자보호 내부통제위원회 운영을 의무화했다. 내부통제기준 관련 조문은 같은 해 9월 25일부터 적용됐다. 보험사들이 이 틀 안에서 영업해온 지 4년이 넘는다.
'어려운 약관과 안내자료를 쉽고 명확하게 바꾸겠다'는 두 번째 약속도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금감원은 매년 보험약관 이해도 평가를 실시해 결과를 공개해왔고, 협회 차원의 약관 개선 작업도 수차례 진행됐다.
세 번째 약속인 '허위·과장 광고 근절'과 '수수료 체계 합리화'는 감독당국이 이미 강도 높게 손을 댄 영역이다.
금감원은 2024년 3월 단기납 종신보험의 환급률 부각 마케팅에 대해 소비자 경보를 내리고 대형 생보사를 상대로 현장·서면 점검에 들어갔다. 그 뒤 생보사들은 10년 시점 환급률을 줄줄이 120% 안팎으로 끌어내렸다.
수수료 쪽도 비슷하다. 보험사가 설계사에게 주는 1년차 모집수수료를 월보험료의 12배 이내로 묶는 이른바 '1200%룰'은 2022년 1월부터 전속 설계사와 GA에 적용돼 왔다. 7월부터는 GA 소속 설계사에까지 확대 적용된다. 결의문이 말하는 '수수료 체계 합리화'는 이미 4년 넘게 굴러가고 있는 과제다.
네 번째 약속인 '보험금 지급 지연 방지'도 마찬가지다. 보험업법은 보험금 지급 사유가 생기면 일정 기한 안에 지급하도록 못 박고 있다.
물론 이번 행사의 무게를 가볍게 볼 일은 아니다. 22개 전 생보사 CEO가 한꺼번에 결의문에 서명한 장면은 보기 드물다.
김진홍 금융위원회 금융산업국장은 이날 "금융업권 최초로 자율적으로 소비자와의 약속을 다짐하는 뜻깊은 자리"라며 "금융산업 전반의 신뢰 제고를 이끄는 모범 사례가 될 것"이라고 했다. 법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업계 스스로 목소리를 모았다는 점은 분명히 새롭다.
문제는 다짐과 변화 사이의 거리다. 그동안 생명보험 분쟁조정 신청, 불완전판매율, 보험금 부지급률이 어떻게 움직여왔는지를 함께 놓고 봐야 이번 결의가 어떤 무게로 다가오는지 가늠할 수 있다.
서영일 금감원 부원장보가 "단기 성과주의를 넘어 장기적 시계(視界)에서 소비자와 상생하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라고 짚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단기 실적 경쟁에 길든 영업 관행이 함께 바뀌지 않으면 결의문은 그 안에 머물 수밖에 없다.
협회는 별도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약속 이행 상황을 점검하기로 했다. 1년 뒤 불완전판매율은 얼마나 줄었을까. 보험금 부지급률은 어떻게 달라질까. 민원 건수는 빠질까.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변화는 결국 이 숫자들에 담긴다.
김 협회장은 이날 "오늘의 약속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앞으로 소비자가 생명보험업계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것"이라며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변화를 만들고 책임 있게 이행하겠다"라고 했다. 그 기준이 실제로 굴러가는지는 1년 뒤 숫자가 답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