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백과] 페스티벌의 계절에 빠질 수 없는 EDM

[라온신문 김소민 기자] 봄은 페스티벌의 계절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만 없었다면 지금쯤 전국 곳곳의 대학교에서도 축제를 열 시즌이며 봄 맞이 페스티벌이 열렸을 것이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쿵쾅거리는 소리, 저절로 몸이 움직이는 신나는 비트, 페스티벌에 빼놓을 수 없는 음악이 바로 EDM이다.

 

EDM은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Electronic Dance music)의 줄임말로 클럽이나 DJ가 주최하는 댄스 파티에 어울리는 전자 음악을 통칭하는 음악이다. 관련 문화는 전 세계적 유행과 더불어 한국 K-POP을 대표하는 댄스 음악의 장르가 됐고 대규모 록 페스티벌을 연상케 하는 일렉트로닉 음악 관련 페스티벌들과 클럽 문화 등 현재 한국 대중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의 역사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이 대중적인 음악 장르가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현재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이라고 부르는 장르는 다른 음악에 비해 역사가 매우 짧지만 지금의 EDM이 나오기까지는 시카고 하우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우스의 탄생지는 1977년 미국 시카고의 게이 클럽이 오픈하면서 탄생했다.

 

 

‘하우스’라는 음악 장르도 해당 게이클럽 이름인 ‘웨어하우스’에서 따온 것이다. 메인 DJ인 프랭키 너클스(Frankie knuckles)는 뉴욕에서 건너온 디제이였고, 뉴욕에서 인기가 많았던 살소울(Salsoul), 웨스트 엔드(West End), 프렐류드(Prelude), 필라델피아 인터내셔널(Philadelphia International) 레이블의 디스코 음악을 주로 틀었다.

 

 

프랭키 너클스가 가져온 음반들은 시카고에서는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시 시카고는 오로지 펑크, 록, 알앤비 음악에 익숙해져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신선하고 한발 앞선 음악이었다. 웨어 하우스 클럽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프랭키 너클스의 인기가 많아지자 프랭키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디제이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웨어 하우스 풍의 선곡을 스트레이트 및 시카고 씬 전반에 퍼뜨렸다. 이로 인해 하우스라는 하나의 새로운 흐름과 트렌트가 생겨나 씬 규모로 발전하게 되며 시카고 하우스가 된 것이다.

 

가령 ‘하우스’로 불리는 트랙은 멋진 클럽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뜻했다. 웨어하우스가 인기가 올라가고 상업화되자 청중들이 좋아하는 음악 스타일로 바뀐다. 너클스는 웨어하우스를 떠나 파워하우스라는 클럽을 차린다.

 

너클스는 사운드 엔지니어링을 공부한 친구인 에라스모 리베라와 릴 방식 테이프 레코더를 활용해 녹음을 하고, 음원을 자르는 등의 편집 기술을 사용했다. 또한 도입부와 브레이크 비트를 늘리며, 새로운 사운드를 얹어서 더욱 복잡한 믹스를 만들었다. 익숙한 트랙 아래로 완전히 새로운 리듬과 베이스 라인을 깔기 시작했다. 이러한 작업들이 오늘날 하우스 음악의 토대를 형성한다.

 

하우스의 시초는 미국이지만 당시 전국적인 인기는 얻지 못했다. 하지만 영국에서 이비자의 클럽문화와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영국 디제이들은 스페인의 유명 관광지인 이비자의 클럽을 방문한 뒤 이국적인 사운드와 영국의 사운드를 결합해 ‘애시드 하우스’ 장르를 소개했다. 애시드 하우스는 영국에서 대중적인 인기 장르로 확산되면서 미국으로 역수입돼 시카고 하우스, 디트로이트 테크노 등과 더불어 인기 영역을 넓혔다.

 

 

1987년 역사상 가장 큰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시카고 프로듀서인 스티브 실크 헐리(Steve Sillk Hurley)의 ‘Jack Your Body'가 1987년 1월 영국 싱글차트 1위에 오르면서 하우스는 역사상 최초의 주류 1위로 떠오르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1988년 애시드 하우스가 인기를 끌면서 이러한 현상을 일컫는 ’애시드 하우스 폭발(AcidHouseExplosion)‘이라는 단어도 탄생한다.

 

2000년대 후반 미국 음악계는 록이 시들해지면서 큰 공백이 생기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음악을 원하고 있었다. 그 공백을 상대적으로 해비한 '일렉트로 하우스‘가 파고든 것이다. 이에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은 유튜브(youtube), 베보(vevo) 등 영상 관련 사이트를 통해 빠르게 전파되고 있으며, 비트포트(beatport)나 EDM.com 등 컴퓨터를 매개로 한 커뮤니티 단체를 통해 자신들만의 장르 영역 개척 및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 씬을 구축해나가고 있다.

 

■ 국내 EDM 열풍

 

 

한국의 언더그라운드 클럽과 디제이의 역사는 영국이나 미국보다 훨씬 늦은 1990년대 중반 시작됐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야 디제이를 아티스트로 보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세대 DJ들은 홍익대학교 인근에 댄스 클럽을 세우며 ‘홍대 클럽문화’를 주도했다.

 

기존의 홍대 앞 인디 음악 씬에서의 수용이 대부분 공연 관람과 단순한 슬램 정도에 그친 것이었던 반면, 테크노나 일렉트로니카로 대표되는 새로운 장르는 춤이 더해져 수용자로 하여금 더욱 적극적인 위치에서 향유할 수 있었다. 이는 춤과 음악을 동시에 즐기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며 새로운 공간인 댄스 클럽을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클럽 언더그라운드, 상수도, 명월관 등이 연달아 문을 열고 음악 마니아를 유혹했는데 한 가지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꽤 강렬한 록에서 모던 록· 브릿 팝· 테크노· 트랜스· 하우스 등 다양한 장르를 섞어 틀었다.

 

2000년대 초 테크노 열풍이 일어나면서 해외의 톱 DJ들의 파티가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고 언더그라운드 문화로 치부됐던 DJ문화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서서히 음악 클럽에서 인지도를 쌓기 시작했다.

 

국내의 클럽문화는 홍대 앞이 그 시초가 된다. 2000대 초에는 매월 마지막 금요일이면 홍대 클럽 앞으로 밀집했고 엄청난 성장을 이루는 결과를 낳는다. 이후 미군부대가 있는 이태원으로 거점 지역이 이동하게 되고 서구적인 문화를 더해 홍대 클럽보다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클럽이 등장하게 된다.

 

이후 새로운 파티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호텔 등 규모있는 공간에서 클럽을 만들어 해외 유명 DJ를 초청하는 일이 잦아졌고 이후 로컬 DJ씬도 함께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에서 EDM은 2010년대부터 현재까지 장르 음악으로 보다는 페스티벌을 통해 공연 산업으로의 흥행에 성공했다. 울트라 뮤직 페스티벌(Ultra Music FestivalㆍUMF) 코리아는 2012년 첫 해 약 5만 명의 관객을 시작으로, 2013년과 2014년에는 약 10만 명, 2015년에는 역대 최다인 11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기록을 세웠다. 국내 뮤직 페스티벌에서 EDM이 주요 장르가 되며 강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클럽과 펍(Pub)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파티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밤새 북적이고 있다. 파티를 여는 사람들은 DJ나 프로모터들도 있지만 일반인과 연예인들도 눈에 띄게 많아졌고 2010년 중반부터 특히 클럽 대관 파티 등을 직접 기획하거나 파티를 위해 디제잉을 취미로 배우는 경우도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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